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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 않는 눈사람

citizen 2004. 11. 12. 13:18
꽃샘바람이 부는 이른 봄날 아침, 하늘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함박눈이
하늘나라에 사는 모든 흰눈들을 불러 모았다. 첫눈, 봄눈, 싸락눈, 풋눈, 밤눈, 가랑눈,
진눈깨비 등 하늘나라에 사는 눈이란 눈은 모두 함박눈한테 모여들었다.
"자 다들 이리로 가까이 오시오."
함박눈이 허옇게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헛기침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내가 모두 모이라고 한 것은 황급히 의논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올 겨울에
우리들이 다들 바빠 땅의 나라에 내려가지 못한 탓으로, 지금 땅의 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어 난리가 났소. 몇십 년만의 겨울 가뭄이라고 하면서 땅의 나라 사람들이 목말라
야단들이오. 이걸 어떡하면 좋을지 다들 좋은 의견이 있으면 한번 말들 해 보시오."
함박눈이 다시 헛기침을 한번하고 말을 마치자 흰눈들은 일단 안심하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무슨 큰 변고하고 난 줄 알고 속으로 무척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가 땅의 나라를 잊고 지낸 것이 잘못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들 땅의
나라로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해마다 가장 먼저 땅에 다녀오는 일을 큰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첫눈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했다.
"올해 들어 땅의 나라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눈들도
많습니다. 더 늦기 전에 땅의 나라에 한번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싸락눈이 온몸을 서걱거리면서 첫눈의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땅의 나라에 한번 다녀오도록 합시다."
흰눈들은 모두 지금 당장이라도 땅의 나라로 내려가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
함박눈은 흰 수염을 다시 한번 쓰윽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땅의 나라에서는 가뭄이 무척 심하다. 하늘나라에 사는 모든 눈들은 지금
당장 땅의 나라로 내려가도록 하라."
이 말을 듣고 가장 기뻐한 눈은 봄눈 형제였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그들 형제는
아직 단 한번도 땅의 나라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땅의
나라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봄눈 형제는 어머니한테 인사를 하자마자 서둘러 땅의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형, 난 지금 기뻐. 콧노래가 저절로 나와. 땅의 나라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나라보다 더 넓을까?"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나라보다는 더 작겠지."
봄눈 형제는 서둘러 도착한 곳은 한국이라는 작은 땅의 나라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가운데 허리 부분이 철조망으로
둘러 처져 있었다.
"형 저게 뭐야? 왜 남북으로 저렇게 갈라져 있을까?"
봄눈 형제는 서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다정히 손을 잡고 있던 봄눈 형제를 갈라놓았다.
"어, 어, 형! 혀엉!"
형의 손을 놓쳐 버린 동생이 바람을 타고 내려앉은 곳은 철조망 위쪽 땅인 북한
땅이었다. 동생의 손을 놓쳐 버린 형이 내린 곳은 철조망 아래쪽 땅인 남한 땅이었다.
봄눈 형제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휴전선이 그어진 남북으로 그만 서로 헤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눈이 내렸다고 좋아서 다들 야단들이었다. 몇 십년
만의 겨울 가뭄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더덩실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남한 사람들이나 북한 사람들이나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마음과는 달리 동생 봄눈은 휴전선 너머 남녘 땅에 내린 형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형 봄눈도 휴전선 너머 북녘 땅에 내린 동생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봄눈 형제들이 서로의 소식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형이 보고 싶어 울다가 잠이 든 동생은 누가 자꾸
툭툭 몸을 건드려 깨어나 보니 아이들이 자기의 몸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남녘 땅에 있는 형도 밤새워 동생을 생각하다가 잠이 든 뒤 깨어나 보니 아이들이
자기의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애들아, 왜 이래? 왜들 이러는 거야?"
"가만 있어. 우리가 널 눈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눈사람이 되면 형을 만날 수 있어?"
"그럼, 만날 수 있고 말고."
"눈사람이 되면 동생을 만날 수 있어?"
"그럼, 만날 수 있고 말고."
봄눈 형제는 남한과 북한의 어린이들에 의해 커다란 눈덩이로 변해 갔다. 그리고 곧
눈사람이 되어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형은 북쪽을, 동생은 남쪽을 바라보며 서 있게
되었다. 진달래가 피고 산과 들에 봄볕이 완연해도 그들은 그대로 녹지 않고 서
있었다.